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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전통의 나라


세상은 이 나라를 오래도록 멀리서만 바라보았습니다.

대륙의 가장 동쪽,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에 자리한 태한제국은 오랜 세월 문을 걸어 잠근 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나라를 지켜온 조용한 강국이었습니다. 봉황이 깃들어 있다는 활화산, '천악산'을 중심으로 뻗은 산지와 고원, 잘 길러낸 뽕나무와 비단, 귀한 광물과 화약, 그리고 무엇보다 만물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무속의 나라. 태한은 검이나 기계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것들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온 문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고요함은 끝나가고 있습니다.

쇄국의 세월이 지나고, 서역의 문물과 신식 학문, 비행선과 기계인간, 외부 세계의 욕망과 재앙이 한꺼번에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개방, 굿판과 과학, 봉황의 분노와 차원 폭풍 사이에서, 태한은 지금 가장 태한다운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마주하려 하고 있습니다.

천악산, 봉황, 그리고 나라의 시작

태한의 시작은 왕궁이 아니라 산에서 비롯됩니다.

건국왕 이금호는 누구도 살 수 없다고 여긴 활화산 천악산 인근에서 가능성을 읽어냈습니다. 양잠과 목화, 광업과 농경에 적합한 땅, 그리고 그 땅을 지켜보는 신령한 존재들. 그는 천악산을 섬기던 무당 현월과 손을 맞잡고, 도적과 산짐승이 들끓던 황무지를 후손들이 살아갈 땅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현월과 무녀들이 봉황의 분노를 잠재우는 제를 올리고, 금호가 개간과 재배, 채광의 기반을 닦으면서, 태한의 첫 숨결이 이 땅에 깃들었습니다.

태한의 건국신화는 그 뒤에 찾아온 피비린내 속에서 완성됩니다.

도적무리 '찬투가 부족'의 침공으로 천악산 자락이 불타고, 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차마스의 군사들이 성산에서 학살을 벌이자, 땅이 갈라지고 용암이 치솟으며 한 쌍의 봉황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만신의 경고를 뒤늦게 믿었고, 마침내 무기를 내려놓은 채 봉황을 향해 절해야 했습니다. 이금호와 만신은 용암 곁에서 제를 올렸고, 봉황은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채 잠에 들었습니다.

NA 57년, 이금호는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태한이라 정했습니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정복이 아니라 달램과 경외, 신화와 삶의 공존 위에 세워졌던 셈입니다.

무속이 곧 생활이고, 정치인 나라

태한을 이루는 가장 깊은 뿌리는 무속입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만물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마을의 수호신과 서낭, 장승과 돌무더기, 점복과 금기를 생활 깊숙이 받아들입니다. 외지인의 눈에는 체계 없는 미신처럼 보일지 몰라도, 태한의 무속은 혼과 신, 영과의 소통이라는 확고한 원리 위에 서 있습니다. 비와 바람, 번개를 부르고 저주를 흘려보내는 무당들의 힘은 단순한 주술이 아니라, 태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고유한 형태의 마법입니다.

그래서 태한에서 무당은 단순한 종교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길흉화복을 점치고, 나라의 앞날을 읽고, 때로는 현실 그 자체에 개입하는 존재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이는 '만신'이라 불리며, 국무당의 수장으로서 국가의 운명에까지 깊숙이 관여합니다. 황제가 나라를 다스린다면, 만신은 그 나라가 어떤 흐름 위에 놓여 있는지를 읽어내는 자에 가깝습니다. 태한의 정치는 왕권과 무속이 나란히 서 있는 구조이며, 바로 그 점이 이 나라를 다른 군주국과 완전히 다르게 만듭니다.

비단과 유황, 그리고 흥의 민족

태한은 신비로운 나라이지만, 동시에 대단히 실용적인 나라입니다.

건국 초기부터 양잠과 농경, 광업과 임업이 국가의 근간을 이루었고, 그중에서도 비단은 태한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대표적인 산물이 되었습니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태한의 비단은 외국의 군주와 상인, 심지어 물욕이 적은 엘프들조차 탐낼 정도의 명품으로 여겨집니다. 북동부 산지에서 생산되는 유황과 귀금속 역시 중요한 재화이며, 특히 차마스가 거대한 괴수와 맞서기 위해 거포를 운용하게 되면서 태한의 광물은 전략적 가치를 더하게 됩니다.

하지만 태한의 진짜 힘은 단순한 생산력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 나라는 예로부터 산짐승과 도적, 그리고 점차 모습을 드러낸 마물들과 싸우며 살아왔습니다. 활과 창, 화포를 다루는 갑사들은 시간이 흐르며 마물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척마갑사로 발전했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재앙을 베어내는 명예로운 직위가 되었습니다. 한편 백성들은 이런 험한 세상 속에서도 노래와 춤, 가면극과 악기를 놓지 않았습니다. 태한이 흥의 민족으로 불리는 것은 낙천적이어서가 아니라, 괴수와 재앙이 들끓는 세상에서 그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마스의 벗, 세상과 거리를 둔 나라

태한은 오랫동안 차마스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차마스가 대륙을 통일하던 시기부터 태한은 비단과 화약, 식량을 공급하며 그들과 우호를 맺었고, 이후에도 양질의 경면주사와 화포 재료를 제공하며 서로를 도왔습니다. 폴라리스가 차마스를 침공했을 때에도 태한은 총과 화포, 군사와 식량으로 그들을 지원했고, 황손 창무를 숨겨 지키는 일에도 관여했습니다. 호천룡이 차마스에 강림한 날, 태한의 동쪽 바다를 가르며 날아가는 거룡의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기록은 양국의 서사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세계가 투사와 코덱스, 신문물과 기계로 급격히 변해갈 때, 태한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차마스가 통째로 바다로 옮겨지는 모습을 보며, 이치에 어긋나는 힘은 결국 재앙을 부른다고 판단한 태한의 국왕 '이문'은 국호를 '태한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그는 이후 쇄국령을 선포하고, 서역의 물건과 기술을 엄격히 제한했습니다.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지만, 표류하는 차마스를 통해 필요한 만큼만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태한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에 '고요한 신비의 나라', '외부와 소통을 거부하는 나라'로 기억되었습니다. 조용하지만 폐쇄적이고, 고풍스럽지만 완전히 뒤처지지는 않은 나라. 그것이 오랫동안 유지된 태한제국의 얼굴이었습니다.

천악산의 굿판

태한의 운명을 바꾼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굿판이었습니다.

NA 497년. 칼리폴리스의 위원회는 천악산에 대규모 차원 폭풍이 닥칠 것이라 예측했고, 이를 봉인한다는 명분 아래 태한의 성산에 강제로 진입했습니다. 현월은 봉황의 기세에 눌려 이번 폭풍은 흩어질 것이라 보았고, 무엇보다 천악산은 외부인이 함부로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땅이라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위원회는 이를 미신이라 여겼고, 안정기와 프리즘을 설치해 폭풍을 강제로 불러내려 했습니다. 그 결과 사고가 일어났고, 천악산은 마침내 분출을 시작합니다.

그 순간 현월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차렸습니다.

봉황의 분노와 폭풍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녀는 삼천의 무녀와 박수를 제물로 삼는 굿을 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파괴된 안정기 옆, 용암이 뿜어오르는 곳에서 검게 재를 뒤집어쓴 만신이 칼을 물고 춤추고, 그녀를 따르던 무당들이 하나씩 용암 속으로 뛰어드는 동안, 음악은 멈추지 않았고 굿판은 하루 종일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하늘을 뒤덮던 폭풍과 산의 분노는 잦아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태한을 한순간에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외부 세력은 그것을 "세계를 구한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했고, 태한제국의 이름은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하지만 태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명예로운 승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이 세상과 정말로 다르다는 사실을 피로써 증명한 날에 더 가까웠습니다.

개방,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세계

천악산의 참사 이후 태상황 이택수는 결심합니다.

태한이 더 이상 시대의 흐름 바깥에서만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것, 세상의 위험을 막기 위해 나서는 이들 곁에서 태한도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침 게비츠의 국왕 '팔로안 4세'의 암살과 함께 새 별이 떠올랐다는 징조를 무당들이 읽어내자, 택수는 마침내 쇄국령 해제를 선포하고 만국과의 자유로운 교역을 시작합니다. 그날 이후 서역의 복식과 학문, 기계와 새로운 생활양식이 태한으로 밀려들었고, 도시를 중심으로 신식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태한은 개방과 동시에 더 깊은 개인적 비극도 겪습니다.

택수의 둘째 아들과 며느리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린 태민과 아영만이 남겨졌습니다. 택수는 황제의 자리를 장자 이원후에게 물려준 뒤, 두 손주를 데리고 세계를 직접 둘러보는 길에 오릅니다. 그는 아에로른과 게비츠, 발루람을 거쳐 칼리폴리스까지 향하려 했고, 그 여정 속에서 태한이 얼마나 좁은 세계 안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이 여행은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 태한이라는 나라가 스스로의 자리를 다시 묻기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만신, 새로운 태한

그러나 세계는 늘 한 번에 하나의 문제만을 내주지 않습니다.

택수의 유랑 중 국무당 양성기관인 '현월당'에서는 차기 만신을 둘러싼 음모와 저주가 터졌고, 결국 오랜 세월 태한을 지켜온 만신 현월은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 채라미에게 '은월'이라는 신명을 내리고, 차기 만신의 자리를 물려줍니다. 한편 나빌에 불시착하여 목숨을 잃을 뻔했던 택수와 황손들은 은인을 만나 간신히 태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후 그를 초청하여 내금위장에 임명하게 됩니다. 무당과 황실, 전통과 외부 세계, 인간과 아인종이 새로운 방식으로 엮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New Age 510년의 태한제국은 더 이상 완전히 고요한 나라가 아닙니다.

황제 원후는 나라를 이끌고 있고, 태상황 이택수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지니며, 태민과 아영은 다음 세대의 상징처럼 자라나고 있습니다. 새 만신이 된 은월 라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저주의 흔적을 쫓아 현월당을 떠났고, 태한은 더 과감한 개방과 더 깊은 전통 사이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봉황의 나라, 무속의 나라, 비단과 화약의 나라, 그리고 이제 막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보기 시작한 나라. 태한제국은 지금, 가장 태한다운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의 문턱 앞에 서 있습니다.